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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present

죽 쒀서 개 주기


W.트리플






 *반 ts 주의


1.

 '띠리링- 띠리링-' 하는 알람 소리와 함께 눈을 떴습니다. 어젯밤 부서 회식에서 도팀장의 비위를 맞춰가며 퍼부었던 게 큰 요인이 됐는지 속이 쓰리다 못해 사포로 위장을 긁어대는 기분입니다. 아프다며 회사를 빠지고 싶지만 도팀장에게 찍히기는 더욱더 싫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죽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납니다.


 가끔씩 드는 생각인데 회사를 때려치우고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 가업을 물려받고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가업이 거창한 게 아니라 감자 농사일뿐이지만요. 원룸 벽을 쳐다보면서 급하게 옷을 입다 보면 별생각이 다 듭니다. 이상하게 아무런 무늬도 없는 벽이 출근할 때만 되면 그렇게 신경 쓰입니다. 정말 심각할 땐, 저 벽 안에 시체가 숨겨져 있는 상상까지도 했습니다. 결국 그러다가 나갈 타이밍을 놓쳐서 지하철역까지 미친 듯이 뛰어가는 게 일상이 됐지만요.



 "팀장님 세잎!!!"


 "오세훈 사원 넥타이 안 매나?"



 도팀장은 지각을 정말 싫어합니다. 복장이 불량한 것도 싫어하구요. 언제는 그래서 학창시절에 선도부를 했냐고 술김에 물어봤더니, 정말로 선도부였답니다. 그 학교를 다녔던 분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예상이 갑니다.


 넥타이를 매고 주위를 둘러보니 죄다 저처럼 숙취에 찌든 모습입니다. 도팀장은 술도 셉니다. 이건 비밀인데 처음에 입사했을 때 도팀장이 너무 갈구길래 회식 때 만취한 모습을 보기 위해 눈치 없는 척 술을 엄청나게 먹였다가 되려 저만 된통 당했습니다. 아마 이 회사에서 도팀장의 취한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나 오늘도 도팀장의 얼굴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납니다.




2.

 이상하게 도팀장이 매번 하던 회의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입사하고 나서 이럴 때가 딱 두 번 있었는데, 첫 번째는 대리님이 30분 늦게 출근하셨을 때와 제가 숙취가 풀리지 않아서 책상 위에 토를 할 때였습니다. 후자는 회의를 하다가 그런 돌발 상황이 일어난 거니 해당이 안 될 수도 있겠네요. 다급해진 저희 팀원들은 잘못한 일이 있냐며 눈으로 대화를 합니다.


 똑똑-. 문이 두 번 두드려지고 열립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몰립니다. 그곳에는 한 여자가 서 있습니다. 오 이게 웬일이죠. 딱 제 스타일입니다. 비록 단발머리라서 조금 아쉬운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딱 제 이상형입니다. 그녀가 부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자세히 보니 목에 사원증이 걸려있습니다. 김준희. 시대에 맞지 않는 이름인 것 같지만 상관은 없습니다. 그렇게 따진다면 도팀장의 이름은 흔하디 흔한 경수고 제 이름은 전 서울시장과 똑같으니까요.


 그녀가 망설임도 없이 도팀장쪽으로 걸어갑니다. 이걸 어떡하죠. 도팀장은 지금 많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도팀장은 여자에게도 화를 불같이 내는 사람이기 때문에 준희씨가 많이 걱정됩니다. 아무리 초면이라고 해도 가리지 않고 욕을 하니까요. 그녀가 도팀장 쪽으로 고개를 숙인 뒤 뭐라고 말을 건넵니다. 도팀장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봅니다. 역시 어떤 남자든지 미녀에는 약한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김준희입니다!"



 그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온 사무실에 울려 퍼집니다. 저런 미성을 가지고도 큰 목소리를 낸다니, 성량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가수 연습생이었던 걸까요. 하긴 저 얼굴이면 연습생 생활 한 번쯤은 해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 도팀장을 쳐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도팀장이 많이 수상합니다. 원래 저렇게 큰 목소리를 내면 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거든요. 제가 예전에 레드벨벳 팬사인회에 당첨이 돼서 작게 소리를 질렀을 때, 오세훈씨는 여기가 회사라고 생각하는 게 맞습니까? 아무리 조용하게 말해도 다 들리는 사무실에서 왜 소리를 지릅니까! 라고 맞받아친 적이 있거든요. 제 생각으로는 도팀장의 목소리가 블록버스터급 영화에서 나오는 폭탄이 터지는 소리보다 컸습니다. 그런데 준희씨의 행동에 아무런 말도 안 하는 걸 보면 아마 그녀가 도팀장에서 소리를 질러도 되냐고 물어본 것 같습니다.




3.

 그녀의 자리는 제 자리 바로 앞으로 정해졌습니다.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그녀를 볼 수 있다니! 이젠 회사에 오는 게 낙이 될 것만 같습니다. 제가 못생긴 편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잘생긴 편이기 때문에 준희씨와 더 깊은 관계가 될 날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마 결혼을 하자고 하면 어쩌죠. 매일 아침마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심장이 남아나질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엄-청 행복할 것 같긴 합니다.



 "저기 오사원님."


 "ㅇ... 예?"



 젠장. 결혼은 무슨 연애도 꿈도 못 꿀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볼을 감싸쥐고 있는 모습을 들키다니. 그녀는 저를 오덕으로 생각할게 분명합니다.



 "커피 뭐 드실 거냐고 물어봤는데."


 "아 커피! 카페 가서 사오시게요?"


 "네. 뭘로 사다 드릴까요?"


 "저랑 같이 가요! 들기 힘드실 텐데."



 그녀가 잠시 저를 빤히 쳐다보더니 그러자며 길을 나섭니다. 커피를 기다리면서 말을 걸어봐야겠습니다. 적어도 열 잔 이상은 만들어야 되니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하죠. 생각도 안 해놨다간 너무 예뻐요! 이 말 밖엔 나오지 않을 텐데요. 그렇게나 많은 여자를 만나던 천하의 오세훈은 죽고 찌질한 오세훈만 남았나 봅니다. 이게 다 도팀장 때문입니다. 도팀장이 여자 문제에 간섭을 한 건 아니지만 일단 나쁜 일은 다 도팀장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녀의 뒤만 졸졸 따라가다 보니 이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매력을 어필하려고 왔는데 다른 생각을 하다 똥개처럼 뒤만 따라가다니. 정말 오세훈 연애세포가 다 죽었나 봅니다. 빨리 그녀의 옆으로 가서 나란히 걷는데 이게 더 잘못된 선택인 것 같습니다. 어쩜 말 한 마디도 오고 가지 않는 건지, 그냥 뒤에서 걸어가는 게 나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런 감흥도 없나 봅니다. 어쩌겠어요. 더 급한 사람이 해야지.



 "준희씨. 어려보는데 몇 살이에요?"


 "네?"


 "아 조금 실례되는 질문인가..."


 "네... 좀..."



 까였습니다. 나이를 알아야 말이라도 걸든가 하지... 더 싸늘해진 것만 같은 분위기는 저만 느끼는 게 아니겠죠?



 "그럼 오사원님은 몇 살이세요?"


 

 생각해보니 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긴 제가 숙녀분께 실례되는 질문을 하긴 했죠. 점점 도팀장을 닮아가나 봅니다. 조금만 지나면 지나가는 사람을 잡고 욕까지 할까 봐 두려워집니다.



 "저는, 몇 살 같아 보여요?"



 준희씨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집니다. 정말 까인 게 아니라 더 멀어졌네요. 그녀가 아마 집에 가면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얘기를 하겠죠. 여기 진짜 이상한 사람 한 명 있는 것 같아. 살짝 오덕 같기도 한데 몇 살 이냐고 물었더니 몇 살 같냐고 다시 되물어보는 거 있지. 아니 그냥 물어보기만 했으면 어느 정도 괜찮았을 텐데 이상한 웃음까지 지었다니까. 나 어쩌지. 그 사람이 내 맞은편 자리란 말이야. 퇴사해야 되나? 상상이 여기까지 미치니 정말 심각해진 것 같네요. 빨리 수습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서른이에요. 삼십 살."


 "아... 저보다 네 살 많으셔요."



 스물여섯인가 봅니다. 역시 어려 보이더니, 아니 그니까 그 나이 얼굴이 아니라 더 어려보인다구요. 스물이라고 해도 속을 만한 얼굴입니다. 그나저나 네 살 차이? 네 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는데. 정말 그녀와 저는 운명인가 봅니다. 드디어 오세훈 인생에도 꽃이 피는 걸까요?




4.

 도팀장의 눈을 피해 그녀와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저는 준희씨와 꽤 친해졌습니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하여튼 제가 들은 바로는 준희씨는 연상의 남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알게 모르게 남에게 의지를 하는 타입이라는데 그래서 연하는 부담스럽답니다. 또 흰 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좋다고 했습니다. 이거 딱 저를 말하는 것 같은데 조금 부끄럽습니다.


 이렇게 이상형도 알고 얘기도 많이 나눠봤는데. 그녀는 아직도 저를 '오사원님'이라고 부릅니다. 신이 나서 떠들고 있는데 하는 말이 오사원님. 저기 팀장님이 자꾸 쳐다보세요. 라니 그때는 정말 온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덕분에 혼나는 건 피했으니 그냥 마음속에 담아두기만 하려구요.




5.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입니다. 전 회식이 있는 날이 제일 싫었습니다. 왜냐하면 막내가 팀장님의 옆에 앉아야 했거든요. 그래서 회식이 있는 날이면 떡이 돼서 집에 들어가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저희 팀에도 신입이 들어왔으니 괜찮을 리가 없죠. 술이 약해 보이는 준희씨의 술을 제가 다 마셔줘야겠습니다.



 "자 우리 준희씨도 한잔 받고!"


 "다 같이 건배!"



 지금 준희씨 손에 있는 잔에 담긴 술은 대리님 특제 폭탄주입니다. 저걸 먹고 살아남은 사람은 도팀장밖엔 없습니다. 심지어 대리님도 자기가 만든 술에 자기가 취한다니깐요. 그걸 준희씨가 마시려고 입에 대고 있습니다. 저걸 어쩌죠. 전 저거 하나 마시면 그냥 바로 쓰러져서 그녀의 흑기사가 되어 줄 수 없을 텐데요.


 목이 타서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그녀를 쳐다보니 술잔이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취한 기미가 안 보이네요. 제가 안 본 사이에 누가 대신 마셔준 거일까요. 그럼 다른 사람이 취해야 되는데 아직 다들 멀쩡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설마 도팀장이 그걸 마셔주진 않았을 텐데.



 "준희씨 괜찮아요?"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그런가. 그녀가 제 목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합니다. 다시 큰 목소리로 테이블까지 두드리며 물어보자 절 보더니 살짝 웃기만 합니다.



 "준희씨 근데 오른손잡이 아니었어요? 왜 자꾸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해요. 설마 그게 술 버릇이에요?"



 그녀는 항상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잡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쥡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왼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주를 집습니다. 그게 술 버릇인 걸까요. 살다 살다 그런 술 버릇은 처음 봅니다. 보다보다 너무 답답해서 몸을 탁자 위로 빼서 오른팔을 잡는데 화들짝 놀라더니 젓가락을 떨어뜨립니다. 순간 치한이라도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누구랑 손을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놀라는지. 그녀가 도팀장이랑 사귀지도 않는데 손을 잡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여자 마음은 정말 모르겠습니다.




6.

 오늘은 도팀장이 병가를 냈습니다. 일 년에 아픈 적이 세 번도 되지 않는 도팀장이 연초부터 독감에 걸렸답니다. 저야 좋긴 하지만 조금 수상합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송년회라면서 한파 주의보가 내려진 밤에 한강에서 팀원들끼리 치맥을 먹었거든요. 도팀장도 함께요.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호프집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치킨을 입에 물고만 있었습니다. 알코올로 몸을 녹이자며 술을 더 많이 퍼부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도 도팀장은 감기에 걸리지 않고 멀쩡히 출근을 했었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을 한다더니."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모릅니다. 아니 말을 인용하는 것도 맞는 상황에 해야 되는 거지 제가 무슨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걸렸답니까. 정말 어이가 없어서. 따지고 보면 무식한 건 도팀장이라고 해야 됩니다.


 몸이 주인을 잘못 만났다면서 실컷 비웃어주고 있는데 9시가 되기 딱 30초 전에 그녀가 죽을 상을 하며 걸어옵니다. 입술이 창백하고 얼굴에는 핏기가 없는 게 어디가 많이 아픈가 봅니다. 저 같았으면 땡잡았다 하고 출근을 안 할 텐데 그녀도 상당한 멘탈의 소유자입니다.



 "준희씨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아요."



 절 보면서 살포시 웃어주는데 평소의 미소와는 느낌이 다릅니다. 마치 저보고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파 죽을 것 같으니 약을 사와라-. 라고 하는 것 같은데 순간 도팀장의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약 사다 줄게요. 많이 아프면 반차 내고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그러실 필요 없는데. 감사합니다."



 배가 아픈 건지 감기인 건지 아님 다른 건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종합 감기약을 사보려고 합니다. 배가 아프면 자연스레 배를 감싸 쥐기 쉬운데 지금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것 같으니 감기가 맞겠죠. 후- 우리나라에 탐정이라는 직업만 있었어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그 일을 하고 있을 텐데. 회사에서 썩히기엔 너무 아까운 추리능력입니다.




7.

 오랜만에 휴일에 밖에 나갔습니다.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정말 데이트의 정석인 코스들만 갔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요. 혹시나 번호를 따일까 봐 품절이 되기 전에 부랴부랴 12개월 할부로 지른 버버리 더블 캐시미어 체스터필드, 그니까 코트까지 입고 왔는데 가끔씩 흘낏 보고 지나가는 여자들만 있습니다. 너무 잘생기면 다른 사람들이 여자친구가 있는 줄 알아서 연애를 못한다는데 그게 딱 제 꼴입니다.


 하도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파서 집에 가려는데 백화점에 대문짝만 하게 쓰인 겨울 상품 특별 할인전이 눈에 들어옵니다. 홀린 듯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가 옷을 보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습니다. 떨이를 파는 거라서 그런가 아저씨들이 입을만한 옷밖에 보이지 않아 다시 나오려는데 속옷 매장이 보입니다. 대체 왜 겨울 상품 할인전인데 속옷을 파는 건지 이해가 안갑니다. 속옷이 언제부터 계절상품이었다고. 뚱한 표정으로 그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더니 직원이 제 쪽으로 다가옵니다.



 "여자친구 선물해주시게요?"



 갓댐. 제가 여자 속옷을 보고 있는 걸로 보였나 봅니다. 변태라고 의심을 안 받아서 다행일 따름이네요.



 "아니..."


 "에이 부끄러워 말고 이리 와봐요."



 팔을 붙잡힌 채 끌려가는데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흘러갑니다. '따라가면 분명히 하나 사가지고 나와야 될 텐데'부터 '사면 누구한테 주지. 준희씨?' 여기까지 수만 가지의 생각이 드는데 속옷의 디자인을 보고 모든 생각이 사라집니다.



 "요즘엔 이 호피무늬가 잘 나가긴 하는데, 여기 이것도 꽤 잘 나가긴 해요."



 직원이 가리킨 건 상상하기도 부끄러운 망사였습니다. 그냥 망사가 아니라 정말... 그니까, 어 진짜 말로 할 수 없는 망사요. 정말 계속 거기에 있다간 그녀에게 속옷 선물을 주고 뺨을 맞을 것만 같아서 뒷걸음질을 하며 빠져나왔습니다. 나중에 그녀와 사귀게 된다면 그 때 그녀의 손을 잡고 와야겠습니다.




8.

 오늘은 외근이 있었습니다. 그녀와 떨거지 도팀장과 함께요. 아침부터 지하철에서 어떤 남자가 엉덩이를 훑고 지나가길래 똑같이 뒤로 가서 엉덩이를 만지고 와서 일까요. 계속 안 좋은 일만 꼬이는 것 같습니다.


 외근을 나가기 전에 화장실에 먼저 갔다오겠다고 분명히 도팀장에게 말을 했는데 상쾌한 기분으로 나오니 사무실에 준희씨까지 없는 겁니다. 솔직히 도팀장은 예상을 해서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그녀가 절 버렸다고 생각하니 정말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주차장으로 내려가 도팀장의 차에 타는데 맙소사, 제가 제일 싫어하는 향수 냄새가 나는 겁니다. 제가 그 향수를 얼마나 병적으로 싫어하냐면 제가 쓰는 향수 이름도 모르는데 그 향수 이름은 외우고 다닙니다. 이름이 뭐냐면 돌체앤가바나 라이트 블루요. 그런데 도팀장이 차에 이걸 뿌린다니, 방향제라도 하나 사다 주고 싶은 심정입니다. 누가 뿌릴게 없어서 차에 향수를 뿌리냐구요.



 "오세훈."


 "예?"



 도팀장에게는 딱 두 가지의 말투가 있습니다. 방금 제 이름을 부른 건 뭔가 심기가 불편하다는 겁니다. 제 행동 때문에요.



 "표정."



 정말 이런 데서 일하다간 속병이 나서 죽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로사도 아닌 화병으로 죽는 거라니. 조금만 더 있다간 욕을 들어먹어서 스트레스성 위장질환으로 죽을 것 같으니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 올렸습니다. 도팀장은 물론 그것도 맘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웃으라고 해서 웃었는데 할 말은 없겠죠. 고개를 돌려 조수석을 쳐다보니 준희씨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쳐다봅니다. 쓸데없는 동정은 거절한다고 미리 말해놨어야 했는데 잊고 있었네요. 이런.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도 꼬인 실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거래처와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추행범이 많이 닮아있었거든요. 거기다 그 남자는 절 보더니 식겁해서 차를 뿜을뻔했습니다. 아마 추행범이 맞나 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차를 뿜어야 될 건 전데 많이 어이가 없습니다.


 추행범은 낯짝도 참 두꺼웠습니다. 아침엔 절 추행하더니 이번엔 그녀를 눈빛으로 희롱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떻게 반격을 해야 될지 몰라 겉옷을 벗어 다리에 덮어주는데 도팀장이 그런 저를 쳐다봅니다.



 "오세훈."


 "네."


 "데리고 나가있어."



 먼저 일어나고 그녀를 일으킨 후에 제 몸으로 가리다시피 해서 근처 카페에 가 앉아있었습니다. 항상 웃던 그녀가 얼굴에 표정이 없는 걸 보니 많이 수치스러웠나 봅니다. 조심스레 이름을 부르니 눈물이 차오르다가 떨어집니다. 손을 뻗어 닦아주려는데 그새 미팅을 끝내고 온 도팀장이 카드를 내밀더니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고 합니다. 얼어 죽겠는데 그게 넘어가다니, 도팀장도 참 냉혈인입니다.




9.

 요즘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아서 한약을 지으러 가는 중입니다. 제가 원래 한약은 안 먹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자꾸 들려서 어쩔 수 없이 황금 같은 주말을 반납하고 한의원에 왔습니다.


 조금이지만 매일매일 아침을 챙겨먹던 것도 거르고 회사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몸을 이끌고 겨우 출근을 해서 자리에 앉았는데 지나가던 팀원들이 다 저한테 어디가 많이 아픈 거냐고 말을 걸고 지나가더군요. 심지어 도팀장까지 제 자리로 와서 반차를 내줄 테니 집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전 일 년에 몇 번 없는 휴가를 한꺼번에 즐기기 위해 괜찮다며 일을 했었죠. 아팠으니까 일의 능률도 역시나 떨어지는데 팀원들은 그건 나무라지 않고 얼굴은 창백해지는데 일하는 제가 많이 걱정됐는지 제 일을 가져가기까지 하더군요. 그래서 조금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심시간이 됐는데 정말 죽을 것 같아서 휴게실에 들어갔더니 쓰레기장이 따로 없어서 한숨을 쉬며 자리로 돌아와 엎드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오빠!"



 전 또 다른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의 부인이 도시락을 들고 찾아온 줄 알았죠. 뭐 한 달에 한 번은 있는 일이니 고개를 팔에 더 깊이 파묻고 잠이 들려는데 그 목소리가 자꾸 귀에 울리는 겁니다. 다들 그런 적 한 번쯤은 있잖아요. 분명히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게 어딘지 모르겠고 계속 신경쓰여서 죽을 것 같고. 딱 그게 제 꼴이었습니다.


 머릿속이 자꾸 복잡해지는데 갑자기 한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저희 부서는 도팀장이 무척이나 예민해서 방음이 엄청 잘 돼있다는 게. 30년 오세훈 인생에서 귀신이란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데 이런 무방비 상태에서 마주치게 된다니. 그 순간만큼은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죽을 거면 귀신 얼굴 한 번 보고 죽자. 하고 고개를 드는데 도팀장의 자리에서 어떤 남녀가 입술을 맞대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전 적어도 처녀귀신만 있을 줄 알았는데 총각귀신이랑 처녀귀신이 여기서 만났다니. 정말 혼절할 뻔했습니다. 귀신이라도 서로 애정표현을 하는 게 들키면 많이 부끄러울 테니까 고개를 숙이고 자는 척을 하다가 한 십분쯤 지났을까요 다시 고개를 들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무실이 조용한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귀신은 현실성이 많이 떨어지니 몸이 많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의식중에 뭐가 있으면 이런 걸 본 건지. 저도 제 머릿속이 많이 궁금합니다.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거겠죠.




10.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가는데 같이 탄 여직원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원래 사내 소문을 듣기엔 여자 화장실이 딱이지만 제가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간 다음날부터 여자화장실에서 제가 변태라는 소문이 흘러나올게 뻔하기 때문에 저는 여직원들이 많이 있는 엘리베이터에 타는 편입니다.



 "그거 들었어요? 어느 부선지는 모르겠는데 팀장이랑 신입이랑 사내연애를 한다지 뭐예요."




 아침부터 사내연애썰이라니. 도팀장이 들으면 기겁할 얘기입니다. 왜냐면 도팀장은 공과 사의 구분이 무척이나 뚜렷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도팀장은 회식도 사무의 연장이라면서 회식을 할 때도 사적인 얘기는 일체 꺼내지 않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살아가면서 실언도 하고 그러는 건데 도팀장한테 실언은 가당치도 않는 말입니다. 가끔 보면 사이보그 같다니까요.


 그나저나 그 사내연애를 한다는 신입은 참 대단합니다. 저희 회사에 있는 젊은 팀장이라곤 도팀장을 합쳐도 다섯 손가락도 안되는데 말이죠. 설마 나이 차이를 극복한 감동 로맨스인 걸까요.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사무실로 들어가니 동기인 이사원이 저에게 휴게실로 오라는 눈치를 줍니다. 가방만 내려놓고 빨리 뒤따라갔는데 하는 말이 참 가관입니다.



 "도팀장이랑 준희씨랑 사귄대."



 참 웃기는 소리입니다. 제가 그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왕싸가지 도팀장이랑 사귄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겠습니다. 사귈 거면 저랑 사귀는 게 더 현실적이겠어요.



 "진짜라니까! 어제 대리님이 지하주차장에서 도팀장 차에 준희씨가 타는 걸 봤다잖아."


 "차 태워주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렇게 따지면 나도 도팀장이랑 사귀게?"


 "그래 차만 태워줬음 이런 말을 안 하지."


 "그럼 또 뭔 짓 했는데?"


 "도팀장이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뽀뽀를 했단다."



 말도 안 돼. 그건 그냥 사내 성추행이 아닐까요. 도팀장이랑 그녀랑 사귀는 시나리오는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야 정신 차리고 빨리 와라. 도팀장이 또 너 잡아먹을라."



 휴게실엔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빨리 안 가면 분명히 화를 낼 텐데 누가 제 발을 잡고 있는 것처럼 몸이 움직이질 않습니다. 진짜, 정말 도팀장이랑 준희씨랑 사귀는 걸까요. 제가 그녀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게 정말인가 봅니다.




11.

 점심시간에 준희씨를 닦달을 해서 많은 정보를 얻어냈습니다. 정말로 그녀와 도팀장은 연인 관계가 맞대요. 허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대체 도팀장님이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만나는 거예요?"


 "그냥, 되게 자상하시잖아요."



 내 여자에게만 자상한 남자가 바로 도팀장이었나 봅니다. 살다 살다 정말 별일을 다 겪어보네요.



 "그럼 언제부터 만난거예요? 입사하고 나서 바로?"


 "아뇨. 그니까 지금 한 이 년 반 정도 넘어가고 있어요."



 이 년 반이면 그녀가 대학생 때부터 아닌가요. 도팀장은 이 년 반 전에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었는데 말이죠. 도둑놈도 이런 도둑놈이 따로 없습니다. 그렇게 준법정신이 투철한 척, 일이 자신의 애인인 척하더니 진짜 애인을 다른 데 숨겨두고 있었다니요.


 그래요. 도팀장이 잘생긴 건 인정하겠습니다. 솔직히 저도 여자였으면 반할만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도팀장은 무드도 없고 성격도 더럽게 싸가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여자에겐 따뜻하다고 하지만 이중인격이 아니고서야 원래 성격이 어디 가겠냐구요. 더군다나 그렇게 틀에 박힌 사고만 하는 사람이 뭐가 좋다는 거죠?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팀장님이 말만 그렇게 하시는거지 그래도 마음은 따뜻하세요."



 그녀는 또 미소를 남기고 자리를 뜹니다. 도팀장이 남자한테까지도 철벽을 치고 다니면 뭘 해요. 준희씨가 여지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데. N극과 S극이라고 이럴 때 말하는 걸까요. 이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조합인 것 같은데 말이죠. 알고 보면 그녀도 제 2의 도팀장인 걸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 님은 떠나가네요. 저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들이 많았던 대학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언제쯤이면 남 좋은 일 안 하고 살 수 있을까요. 전 도팀장보다 성격도 좋고 키도 큰데 말이죠. 제 밥그릇에 죽을 퍼 넣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좆겠습니다. 


 아니, 좋겠다구요.



FIN.